자연-자유

● 동서예술의 궁극목표는 자유의 획득일 것이다. 한국화는 오랫동안 문인화의 영향으로 더욱 그러하다.

당의 장언원이 “意在筆先,畵盡意在”라고 했듯이, 우리는 작업 결과인 작품도 소중하지만,

작업이전에 화의(畵意)가 서 있어야 하고 그림이 끝난 뒤에도 남아 있어야 하므로, 과정동안

지속되는 작가의 뜻(意) 그 자체도 중요하다.

동양화가의 제작 이념세계는 그 사람 속에 깊이 뿌리를 내린 자연이해에 기초하고 있다.

홍 순주 교수의 자연 해석은, 그동안 〈결〉시리즈를 통해 알려져 있듯이, ‘결’을 통한 자연이해였다.

사실상 ‘결’은 물결, 살결부터 종이, 돌 등에 이르기까지 가시적인 자연의 표피의 어떤 규칙인데,

그녀의 〈결〉 작업은 거의 대부분이 ‘검은 먹으로 뒤덮인 무표정한 면 위에 자신의 숨결이 담긴,

무심하게 그어댄 호분의 붓질에서 흘러내린 가닥들이 교차되어 어떤 구조를 이룬 것’이다.

그녀는 “나에게는 화면에 자유롭게 그어대는, 나의 숨결이 담긴 무심한 붓질의 순간이 가장

자유롭다”고 말한다. 실제로 그 자유로운 붓질은 북송의 형호(荊浩)가 『필법기』에서 일생의

학업으로 수행하면서 잠시라도 중단됨이 없어야한다(期終始所學勿爲進退)고 했듯이, 계속 반복되는,

즉흥적인 작업이라, 결, 역시 어떤 틀이 있는 것이 아니고, 동양화의 적묵법(積墨法)처럼 어떤 영감의

상태에서의 작가의 자유로운 붓질에 의해, 마치 당(唐)의 장언원(張彦遠)이 “회화란 저절로 발현되는 것이다(發於自然)”라고 말했듯이, 붓질이 쌓여진 결과 저절로 만들어진 것이다. 그런데 자연은 어원을 소급하여 보면, 자유, 자유자재와 동의어이다. 그렇다면 그림들은 그녀의 자연의 발로, 자유의 발로라고 할 수 있다.

현대인의 부조화-추상

● 그녀의 〈결〉시리즈가 40대에는 색이나 먹의 감성적 표현과 구성에 집중해왔다면, 이번 전시는 다음 두 가지 점에서 차별화된다. 하나는 이제까지 주(主)였던 하늘의 색인, 검은 현색 바탕에 흰 호분에 의한 ‘결’이 기하학화 되어, 흑·백, 그리고 청·홍(紅)으로 일정한, 그러나 굵은 수평선·수직선 안에서, 또는 전면에 걸쳐서 자기주장을 강하게 하거나, 최근에 올수록 흑(黑)이 전 화면을 다시 덮어, 오염된 서울 밤하늘에서의 별처럼 잠깐잠깐 비칠 정도에 불과하다. 즉 그 많은 붓질에도 자세히 보지 않으면 느끼지 못할 정도가 되었다. 나무결이나 창호지의 결이 자세히 보아야 알 수 있듯이, 그녀의 ‘결’은 가까이에서 자세히 보아야 그 주도성을 획득한다. 일찍이 북송시대 산수화의 쌍벽이었던 이성(李成)과 범관(范寬)의 작품에서처럼, 그녀의 한 전시회에서 ‘가까이에서’와 ‘멀리서’보는 것이 전혀 다른 효과를 드러내 양면화되고 있다.

 

그녀의 그림은, 근작(近作)으로 올수록, 인위라든가 한국적 감성의 색사용이 사라지고, 어떠한 자연대상을 연상하게 하는 구상적(具象的)적 요소도 사라졌다. 이것은 볼링거가 이야기했듯이 자연과의 부조화에서 온 것이 아닐까? 현대의 물리적인 폭력, 언어나 지상(紙上), 인터넷 등을 통한 폭력이, 또는 최고지상만을 꿈꾸므로 생기는 현 한국사회의 모든 문제가 우리로 하여금 편안함을 상실하게 한 결과이리라고 생각된다.

天 -自然

동아시아인은 자연을 천(天)·지(地)·인(人)으로 이해했고, 천(天)이 천지인을 주도했다. 이제 그녀에게 남은 색은 거의가 흑(黑)과 청(靑), 홍(紅)뿐이다. 우리의 전통, 자연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돌아온 자연은 이전의 감성적인 고은 색이나 먹색, 호분의 백색이 아니다. 그녀의 이번 전시회의 색은 대부분이 푸른색과 흑색에 한정되어 있다. 이것은 아마도 천지인의 천(天)의 색이 아닐까? 생각된다. 천(天)의 색은, 천자문에 의하면, 우주공간처럼, 검은 현(玄)색이요, 낮의 하늘색은 청색(靑色)이며, 가까이에서 보면 투명한 빛의 색, 굳이 말하라면 빛의 백색이고, 紅은 낙관의 도장의 색이다. 이 이외에는 거의 없다. 그런데 주(主)인 검은 현색도, 마치 우리가 밤하늘이 캄캄하지 않고, 투명한 깊이가 느껴지듯이, 그녀도 검지만, 투명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흑의 경우, 이제는 결이 가까이서밖에 느껴지지 못 할 정도로 덮어버렸다. 그러나 그녀의 흑과 청색의 작업이 투명한 것은 우리의 흰색 -빛 선호사상의 맥 하에서 읽혀진다.

역설적인 표현 -버림·벗어남(脫)·은현(隱現)

● 그녀의 이제까지의 화면 구성은 가로·세로(縱橫)의 사각, 마름모, 또는 각을 변형한 한국적인 틀 내에서 이루어졌다. 이제 그러한 틀은 거의 사라졌고, 장식적인 색이나 구성요소도 없어졌으며, 낙관도 없다. 그녀에게서, 무(無)가 유(有)보다 더 표현적이라는 한국인의 여백의 역설, 즉 ‘버림’이 오히려 얻는 것이요, 더 자기를 주장한다고 생각하는 미의식의 역설(逆說)이 시작되고 있다고 생각된다. 그것은 버림·벗어남(脫)이 오히려 얻는 것이요, 더 자기를 주장한다고 생각한 유교, 도교, 불교의 영향이다. 오히려 버림·벗어남(脫)으로 그 존재를 더 극대화한 것이다. 이것은, 동양화의 한 특성인 은현(隱現)·장로(藏露)에서, 즉 전통산수화에서 무(無)인 연하(煙霞)가 산의 크기(大)를 더 크게(大) 하듯이, 가림, 덮음의 은(隱)·장(藏)을 통해 더 존재를 강조하는 그 ‘버림’을 시작한 것이다. 최소한 자기를 드러내는 낙관조차 버려, 우리문인화의 전통이었던 ‘자기’라는 지주대도 사라졌다.

담채(淡彩)-자연-빛

● 그녀는 오랫동안 수묵담채를 해왔다. 동양화의 수묵담채는 유교의 平淡에 대한 요구의 결과였다. 그러나 이번 전시의 ‘결’ 작업은 수묵담채가 이가염의 적묵(積墨)처럼 적묵이 보여지거나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 먹면 위-호분-흑연의 흑색면이라는 층 구조를 갖고 있으면서도 맨 위의 흑연의 검은 색과 푸른색조차, 재료는 달라도 담채에서 나오는 담한 분위기가 난다. 마치 빛이 투과하듯, 담하면서 맑은 반투명, 또는 투명한 색뿐인 듯하다. 담채 그 아래로 쌓인 결이 보이면서도 맑고 담한, 즉 중첩은 하되, 이제까지와는 다른, 맑고 담(淡)한 분위기가 연출되는, 또 하나의 다른 수묵담채로의 실험이다.

● 화가는 자유를 소망한다. 그는 자유를 추구하면서 전통적인 사유와 담채, 적묵법같이 먹이나 색을 쌓아가는 법을 사용하되, 현대화한 자신의 실험방법으로 찾아가고 있다. 그녀는 오늘날의 ‘현(現)’과 ‘로(露)’, 즉 드러냄과 과시가 난무해 우리가 지나치게 왜소해진 시대에 동양적 절제의 숨김(隱)과 감춤(藏)을 통해 우리에게 참(眞)이 무엇인가를 일깨우고 있는 듯하다. 

김기주 | 동덕여자대학교 회화과 교수, 미학․미술사․철학박사